[자료설명]
1. 우리 민족과 국가의 성립
(1) 하나로 뭉친 겨레
■ 선사 시대
- 선사 시대 : 문자로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로, 유물과 유적을 통해 그 때의 생활 모습과 일어난 일들을 알 수 있다.
- 구석기 시대 : 뗀석기를 이용하였고, 동굴에서 살면서 열매를 따거나 사냥을 하였다.
- 신석기 시대 : 간석기를 이용하였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움집에서 생활하였고,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청동기 시대 : 청동기를 이용하였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농사짓기 좋은 평야나 하천에서 가까운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땅 위에 기둥을 세워 집을 지었다.
■ 고 조 선
-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세웠다.
-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후에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더욱 강해졌다.
- 왕 밑에 여러 관직이 있었고, 8조법을 만들어 백성을 다스렸다.
■ 삼국의 발전과 문화
나라 / 시조 / 위치 / 전성기 / 수도 / 문화적 특징과 문화재
고구려 / 주몽 / 한강의 북쪽지방 / 광개토대왕(5세기) / 국내성→평양성 / 힘이 넘치고 패기있음, 광개토 대왕릉비
백제 / 온조 /지금의 전라도지역 / 근초고왕 (4세기) / 위례성→웅진→사비/섬세하고 우아함, 무령왕릉, 금동대향로
신라 / 박혁거세 / 지금의 경상도지역/ 진흥왕 (6세기) / 경주 / 씩씩하면서 우아함, 금관, 분황사 석탑
■ 삼국을 통일한 신라
- 신라는 백제(660)와 고구려(668)를 멸망시키고, 676년 신라 문무왕대 삼국을 통일 하였다. 이로써 단일 민족 국가로의 기틀이 마련됨
- 신라는 불교를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통합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불국사, 석굴암, 석덕대왕 신종 등과 같은 문화재
를 남겼다.
■ 발해
- 고구려가 멸망한지 30여 년이 지나 옛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한반도 북쪽에 '발해'를 세워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를 이어갔다.
- 발해의 문화와 예술은 고구려 문화의 특색 위에 당의 문화가 더해져 매우 세련되었다.
(2) 민족을 다시 통일한 고려
■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 신라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로 분열되엇다가 고려로 통일 되었다.
-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가 실시되었고, 지방 제도가 정비되었다.
- 최승로는 '임금이 지켜야 할 28가지(시무 28조)'를 왕에게 건의하여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다.
- 고려는 송나라, 일본, 아라비아 상인등과 무역을 하였고, 무역의 중심지는 벽란도였다.
- 고려의 수출품은 금, 은, 구리, 인삼, 종이, 나전 칠기, 화문석, 부채 등이고 수입품은 책, 약재, 비단, 향료, 차 등이었다.
■ 북방 민족의 고려 침략
- 거란과의 싸움
① 거란의 1차 침입 때 : 서희가 외교 담판을 지어 거란을 물러나게 하였다.
② 거란의 3차 침입 때 :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족을 무찔러 승리를 거두었다.
- 여진과의 싸움 : 고려는 윤관으로 하여금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여진 족을 물리치고 함경도 지역에 9성을 쌓게 하였다
- 몽고(원)와의 싸움
① 몽고는 여러 차례 침략하였고, 고려는 몽고와 싸우기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② 몽고의 침략에 대해 고려는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결국에는 몽고에 굴복하고 몽고(원)의 간섭을 받았다.
③ 공민왕 때 : 원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 고려 시대의 문화 유산
- 팔만대장경판 : 부처의 힘으로 몽고를 물리치려는 소망으로 16년에 걸쳐 만들었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장경판전은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 금속 활자 : 세계 최초로금속 활자를 만들어 '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인쇄하였다.
- 고려 청자 : 맑고 투명한 푸른빛이 돌며 상감이라는 무늬 새기기 방법을 사용하였다.
(3)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
■ 조선의 건국 과정
- 조선의 건국 :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함.
- 도읍 : 한양(지금의 서울)
- 한양이 도읍지가 된 까닭 : 교통이 편리하고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새로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기에 적합하기 때문
■ 조선의 새로운 정치와 제도
- 유교의 정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쳤다.
-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기록한 경국대전을 만들었다.
- 남자들은 신분 증명서인 호패를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다.
■ 조선의 대외 관계
- 외교 방침 : 사대 교린
- 명과의 관계 : 개국 초부터 사신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다하는 외교 관게를 유지
- 여진과의 관계 : 각종 회유책(조선 여인과의 혼인 권장 등)을 씀과 동시에 군사적 경계 유지
- 일본과의 관계 : 왜구의 침입에 강력 대처,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 정벌, 세 개의 항구(삼포)개방
■ 조선 초기의 문화와 과학 기술의 발전
-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우리 말과 글을 일반 백성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 과학 기술의 발전 : 물시계, 측우기, 혼천의, 간의, 해시계(앙부일구) 등 발명
- 농사직설 : 농사에 관한 기술을 해설한 최고의 농법서, 농업 생산량 증대에도 도움을 주었다.
■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
- 조선 시대의 신분 : 양반, 중인, 상민, 천민
■ 임진왜란
- 임진왜란 : 1952년 4월 왜군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
-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우리 군사는 처음에는 여기 저기서 계속 지기만 했다.
- 왜군이 한양 부근까지 쳐들어오자, 선조는 한양을 떠나 의주까지 피신하였다.
-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 전술, 빠른 조류를 이용한 전술 등을 사용해 왜군을 물리쳤다.
-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였다.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정치 문화 발달에 기여하였다.
■ 병자 호란
- 병자호란 : 후금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운 후, 조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나 조선이 거절하여 일어난 전쟁
-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 가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을 공격하자는 북벌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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