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 그의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내정에 있어서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1609년)에 대동법을 경기 일원에 실시하여 농민들의 세 부담을 줄여주었고, 1611년에는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였다. 1613년에는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도록 하여 민초들을 위한 의료체계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왜란 중 불타버린 사고를 정비하기도 하고, 국경의 경비에 유의하여 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 강화에도 노력하였다. 외교에 있어서는 1609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였으며, 왜란 후 동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한 후금과 쇠퇴하는 명에 대해서는 중립 외교로 대처함으로써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하였다. 즉 1618년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는 그 요청에 못 이겨 강홍립으로 하여금 1만여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조케 하였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다. 이에 명군이 불리하게 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고, 이 때문에 후금의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은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리적 중립 외교 정책은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게다가 광해군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1613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폐하고, 이어 1618년에 인목대비의 호를 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것이 서인들의 광해군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움직임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결국 1623년 서인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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