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은 고려 시대 원 간섭기에 대한 수업 내용이다. 이를 배우고 난 후 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역사 의식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철 수:선생님! 왜 원 간섭기의 왕들은‘조’ 나 ‘종’ 자를 붙이지 않고 ‘무슨 무슨 왕’ 이라 했어요?
선생님:그것은 원나라 입장에서 고려를 제후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고려 왕을 강제로 원나라 황실의 딸과 결혼시키기도 했지요. 또 원에 충성하라는 의미로 왕의 시호 맨 앞에 ‘충성 충(忠)’자를 붙이기도 했지요.
영 희:그럼 왜 고려는 원나라에 흡수되지 않았어요?
선생님:끈질긴 항전의 결과였지요. 강화도의 고려 정부도 항전에 참여하였지만 그보다도 일반 민중들이 용감하게 대항했지요. 그리하여 원나라도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
① 갑:역경을 극복하려면 민족의 단합과 역량이 필요해.
② 을:역시 원나라는 대국이야. 나라는 크고 봐야 한다니까.
③ 병:나약한 문신들보다 무인들이 정권을 더 오래 잡았어야 했는데.
④ 정: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는 김에 원나라도 정벌했으면 좋았을 텐데.
⑤ 무: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성공했더라면 고려의 입지가 더 강화되었을 텐데.
2. 밑줄 친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 신문왕 9년 1월에 내외관의 ‘이것’ 을 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 경덕왕 16년 3월에 여러 내외관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이것’을 나누어 주었다.
◦ 소성왕 원년 3월에 청주(菁州) 거노현을 국학생의 ‘이것’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
① 일정 지역의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수취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②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특별히 내려 준 것이다.
③ 이것의 혁파는 왕권의 약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④ 이것의 부활은 관료전 및 정전의 폐지 이후 가능하였다.
⑤ 고려의 전시과 제도는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